리는우리의삶을낭비하고있나요? 이것은 최근 모닝커피를 마시기 전 아침에 제 마음속을 맴돌던 질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저는 여러 사역자들이 교회 여러 이슈들로 인해 빠질 수 있는 것과 같은 낙담의 늪에 빠졌고, 그것은 때때로 목회자와 결혼한 사람에게 닥치는 늪입니다.

교회 사역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보다 과거의 더 많은 경험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저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슬픔은 아마도 먼 훗날 제 남편 브렌트가 강단에서 물러나 옷깃을 풀 때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저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11개 교회, 그들과의 새로운 시작들, 그들과의 작별과 인사들 등 우리가 지금까지 지난 30년 동안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지금의 삶과 지금의 교회에는 선하고 옳은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그의 백성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온 세상을 넘나드는 그런 특별하고도 기적적인 교회의 사랑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품는지 보며 감동했습니다. 수년간, 우리는 무료 주택 개조 프로젝트, 육아 강좌, 청소년 레저활동, 연극과 콘서트, 바자회와 교향곡 공연, 난민 후원, 금요일 저녁 식사, 수프가 제공되는 점심, 성탄절 칠면조 파티, 가능한 모든 형태의 알파 프로그램, 전통 예배와 현대 음악, 또 여러 다른 사역을 통해 우리가 설립한 여러 특정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많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동체의 일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제 생각에는) 교회는, 교회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을 제공했습니다. 두 손은 가득 찼고, 그것이 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더 크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적어도 저에게는, 사랑이라는 표면 아래, 우리 교회가 더 커지고, 더 나아지고, 그래서 더 나아져서 더 크기를 바라는 욕망을 애써 숨기며 주변에 다가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창의성, 교인 숫자, 교회 크기 및 영향력에서 성공을 거두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몸집을 더 키워 더 퍼져 나가려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회개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내려놨습니다. 우리가 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직한 평가는 거의 언제나 우리를 일종의 회개로 이끕니다. 저는 이 강대상을 둘러보며 저 혼자 무릎 꿇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성장에 집착하고 있음에 대해 확실히 회개할 수 있습니다.

최근 교회 아침 식사 모임 때, 저는 교회 자매의 작은 코끼리가 조각된 나무 목걸이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멋진 여행의 추억으로 시장 노점상으로부터 조각품과 피륙으로 구성된 그 보물을 신중하게 고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너무 좋아요.”라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보석을 만지며 말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연약해 짐으로 인해, 대화를 계속하려 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제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요,” 라고 그녀가 작은 코끼리 한 마리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제안했습니다.

“감사하지만, 아니에요.”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직접 생각해 내는 게 낫겠어요.” 손가락 사이에 작은 코끼리를 끼운 채, 제 친구는 잃어버린 단어를 찾아 마음의 문 뒤 서랍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그녀가 현재 겪는 일에 대한 무례한 접근이 될 수도 있겠다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났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침묵 속에 서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겼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미소를 짓고, 어깨를 으쓱하고, 줄을 서기 위해 떠났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생산적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따로 움직였고, 저는 크로와상과 크랩애플잼을 찾으러 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고 시간으로 계산해 보면, 그것은 좋은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시간 낭비가 사랑의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몇 주 후에 저는 성찬식을 진행하는 동안 강대상 뒤에 서서, 제가 평소에 좋아하듯, 교인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떡과 잔을 받기 위해 옆 통로를 통해 걸어 내려오고, 받은 후 중앙 통로를 통해 그들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예전의 간격 제한 때문에 레드 카펫에 표시한 X 표시들을 지나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린 바로 그 교인이 그곳에 계셨는데, 그녀는 우리가 여전히 지켜야 할 코로나 관련 규칙에 따라 성찬 빵을 받아서 잘 쥐고 중앙 통로를 통해 자신의 자리에 가서 다시 앉았습니다. 뒤에는 그녀를 추월하지 않기 위해 그녀의 속도에 맞춰 속도를 늦춘 수십 명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많은 교인들을 의식하지 못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느린 행진이었습니다. 그 회중은 성스러운 행진에 참여한 것처럼 그녀 뒤에서 온화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따뜻해졌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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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앞에서 펼쳐진 그 장면에서, 저는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교회가 제대로 해 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한 더디고 인내심 있는 걸음걸이로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 희귀한 선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지만, 우리가 만나는 외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옆에서, 뒤에서 천천히 걷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매년, 부활절의 새벽은 우리에게 세상이 낭비로 볼 수 있는 것이 실제로는 경이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메시아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메시아는 가장 거룩한 여행을 성취하신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생명이며,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은 모든 것을 뒤집고 전복시키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활절은 가장 화려하고 파괴적인 소망이며, 캐나다 겨울이 마지막으로 몸부림을 치는 동안 우리 창을 지나가는 공작새와 같습니다. 성공은 세상의 관점과는 다르게 보이는, 우리가 굳건히 서 있는 교회의 겸손함과 장엄함입니다.

부활절은 결코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매우 신실하고, 거룩한 연주 같은 길고, 느리고, 확실한 순례의 길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다는 것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증명하는 날입니다.

Karen Stiller는 ‘사역자의 부인: 믿음, 의심, 우정, 외로움, 용서 등에 대한 회고록’의 저자이자 Faith Today의 편집자입니다.

이 글은 ‘새 생명의 출현’(New Life Rising) 기사의 일부이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the meaning of Jesus’ death and resurrection) 성경 공부에서 인용했습니다. 사순절, 부활절 또는 연중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이 특별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http://orderct.com/lent를 방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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