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웨이 리서치(LifeWay Research)에서 실시한 최근 연구에서 미국 개신교 목사들에게 신도들 중 여성들에게 여섯 가지의 특정한 분야의 리더 역할을 맡기는 것을 허용하는지 조사해 보았다.

설교에 관한 견해는 예상대로 나뉘었지만, 아론 얼스(Aaron Earls)에 의하면 대략적으로 “90%의 목사들이 여성이 교회에서 주일학교 사역자(94%), 소위원회 리더(92%), 청소년부 사역자(89%), 또는 성경 공부 교사(85%)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여성이 집사가 될 수 있다고 답한 사람은 64%로 더 적은 수였다.

여성이 교회 내 어떤 분야에서 봉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수 세기 동안 서로 다른 교단의 성서학자들이 토론한 끝에,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라이프웨이 리서치의경영 디렉터 스콧 맥코넬은 밝혔다.

특히 성경의 첫 부분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창조 기사를 성 역할의 패러다임 관점으로 보곤 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 기사가 진행되면서, 전체 성경의 논쟁도 진행됩니다.”라고 레이먼드 C. 올트런드 주니어는 주장한다.

창세기 2:18의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주된 역할이 남편의 리더십을 내조하는 것이라 주장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다. 다른 이들은 여성의 복종과 섬김에 대한 확고한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남성을 은혜로운 지도자로, 여성을 필수적인 돕는 배필로 만들었습니다.”라며 가능한 한 부드럽게 해석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단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종속관계를 연상케 하는 의미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해석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문제를 일으켰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이 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는 상호주의와 평등주의 진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하다. 우리 모두 창세기 본문이 말하는 것을 더 자세히, 주의 깊게 보아야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돕는 배필”은 사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모든 일에 있어서 온전한 동반자라는 의미이다.

인간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명확하게 창세기 1:26-28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백미로 남성과 여성 둘 다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고대 근동에서의 이 표현의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이 땅에서 물리적으로 대표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이 지위는 성별에 관계없이 주어진 임무인 통치권을 통해 표현된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번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함께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은 서로를 지배하라는 지침은 받지 않았다. 팀워크는 이미 제시된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본원리는 인간의 창조가 보다 친밀한 형태로 재설명되는 창세기 2장으로 넘어갈 때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동산에 자리 잡은 그 남자에게는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임무가 주어진다(창세기 2:15).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가 혼자라는 점이다. 많은 짐승들이 동산에서 살아가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와 우정 관계를 맺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만약 그 남자가 명령받을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면, 그는 황소나 노새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를 따라다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면 그는 개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온전한 파트너로서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도울 수 없고, 누구에게도 그가 하나님이 정한 한계를 지킬 책무를 물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 부족한 것은 “그와 함께 하는 돕는 배필”인 ʿēzer kenegdô이다.

이제 여성 쪽으로 가 보자. 그녀는 동산의 어떠한 짐승도 제공할 수 없는 본격적인 동반자 관계를 제공함으로써 창세기 2장의 구도 갈등을 해결한다.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이 구절은 두 가지 주요 주장에 대한 논점을 제공한다.

첫째, 하나님은 남성이 여성을 인도하고, 여성에 대한 권위를 갖도록 지명하셨다.

둘째, 여성은 따름으로서 남성의 리더십을 지지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가정은 면밀한 검토 과정을 쉽게 통과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요점은, 비록 그런 점이 있기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근본적인 유사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동등한 지위에 관한 것이다.

여성은 어떠한 다른 피조물도 아니라는 점에서 남성과 같다. 미래에 모든 남성이 여성의 몸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성은 남성의 몸에서 나왔는데, 이는 그들의 신비로운 연합을 넌지시 보여준다. 그녀는 “그와 대등하다” (창세기 2:18,20절의 히브리어 kenegdô).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이 그 남자에게 부여한 일을 지원하는 일을 함으로서 파트너의 역할을 성취한다. 그들은 함께 땅에서 함께 생육할 것이며, 함께 다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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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그녀를 남성의 “돕는 배필”이라 부를까? 이 말은 남성이 보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는가?

창세기 2:18의 영어 번역본(NIV, NLT, ESV, NRSV, NASB)에서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남성이 주도권을 잡고 여성은 지원하는 역할임을 시사한다. 그녀는 기업 최고 경영자의 안내 비서, 쿼터백의 치어리더, 혹은 외과 의사의 간호사 정도이다.

역사를 통틀어, 여성들은 이러한 역할을 종종 부여받았고, 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히브리어 단어 ʿēzer에 대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ʿĒzer는 어떤 종류의 도움을 제공할까? 성경에서 ʿēzer들은 누구일까?

구약의 나머지 부분에서 ʿēzer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 번째는 전투를 돕는 동맹군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14, 역대상 12:1-22) 두 번째,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지칭한다. (창세기 49:25, 역대하 32:8, 시편 10:14, 이사야 41:10-14을 보라.)

분명, 그 구절들에서 “돕는 자”는 추종하는 역할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신다. 구약학자 메리 콘웨이는 “kenegdo라는 말은 종속이나 열등감보다는 능력과 평등을 함축하는 용어인 ‘그와 대등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ʿēzer라는 단어는 구약에 90번 이상 보통명사로 등장하지만, 종이나 부하가 그들의 주인을 위해 하는 일을 지칭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전투에서 패배할 위험에 빠져있을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와서 당신의 축처진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줄 지원부대인 ʿēzer 즉 기병대나 신적 개입이다.

이것은 여성들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그 남자에게는 비서, 조수, 또는 그의 명령을 수행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피조 세계를 운영하고, 동산을 유지하며, 침입자로부터 동산을 지키는 온전한 파트너가 필요하다. 그에게는 여성이 필요하다.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여성에게 맡긴 역할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다. “필요한 협력자” 또는 “필수 불가결의 파트너”가 이 단어에 대한 더 나은 번역일 수 있다.

복음주의 운동의 정식회원으로서, 필자는 우리 공동체의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창세기 2장이 아닌 3장의 성 역할에 대한 교리가 전반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보게 되는데, 그건 미스터리라 할 수 있다. 창세기 3장이 성의 계층구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을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3:16)

하지만 이러한 역동성은 인간의 반항으로 인한 끔찍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와는 결국 아담이 동산을 지키는 것을 돕는 일에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교활한 침입자는 하나님의 명령의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남편과 아내는 그 거짓말에 넘어갔다. 그 결과,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는 심하게 뒤틀렸고, 그들 서로의 관계와 그들이 관리해야 할 땅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때, 하와는 자신의 죄에 대해, 그리고 아담 역시 자신의 죄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와가 단지 조수에 불과했다면, 하나님은 그녀를 완전한 도덕적 대리인,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잘못이 전적으로 그녀에게 있었다면, 아담은 유죄로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3장을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장의 본문은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닌 인간의 반항이 초래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여성이 남편의 지배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는 이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그들을 역기능의 자리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들의 지혜를 믿기로 선택했고, 그 선택은 실수였으며, 그 실수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들을 위한 휴식 공간을 세심하게 준비하듯,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줄 가시덤불, 엉겅퀴, 그리고 남성의 지배를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되찾고 싶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설계하신 일에 남성과 여성이 동역자로 나란히 서 있는 창세기 1,2장을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짓지 않았나? 그리고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위계질서를 의미하지 않나? 필자는 이름을 짓는 것이 위계질서를 의미한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갈은 창세기 16:13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신학 교수 글렌 크라이더는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은 것은 타락 이전이 아닌 이후임을 지적한다(창세기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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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을 수정해보자.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끌도록 지명하셨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이끌면서 남성들의 리더십을 지지하도록 만들어졌다.

필자가 하지 않은 말은 듣지 않아도 된다. 필자는 여성들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성별에 관계없이 서로 섬기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은 모두의 종이셨고, 우리 모두에게 자신을 본받을 것을 말씀하신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섬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직업에 있어서 필수적인 표현이다.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바로 왕을 섬기는 것에서 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구조이다(출애굽기 7:16).

오늘날 우리의 삶과 연관 지어보면, 그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가 창세기 2:18을 “섬김”에서 다시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로 읽고 성별에 따라 불공정하게 적용할 때 발생한다. 창세기 2장에는 그런 말이 없다. 성경에 없는 말을 다르게 말하는 것은 본문을 마음대로 변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 역할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교훈이 아니지만, 대화를 시작하기에 충분히 중요한 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새롭게 논의를 시작하기에 매우 도움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카르멘 조이 임스(Carmen Joy Imes)는 바이올라 대학교 탈봇 신학대학원(Biola University Talbot School of Theology) 구약 부교수이자 Bearing God's Name: Why Sinai Still Matters의 저자이다.

이 기사의 일부는 Carmen Joy Imes의 Being God's Image: Why Creation Still Matters (InterVarsity Academic, 2023)에서 허가를 받아 발췌, 각색되었습니다.

Speaking Out은 Christianity Today의 게스트 오피니언 칼럼이며 (사설과 달리) 본 기관의 의견을 대변하는 글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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