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살고 있고, 다녔던 고든 콘웰 신학교(Gordon-Conwell)가 지난 10년간 입학률이 50% 이상 꾸준히 감소하자 본교 매각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미국인의 3분의 1 이상이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복음주의자로 인식하고 있기에, 신학교의 쇠퇴는 어떤 면에서 수수께끼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신학교를 장애물로 생각하며, 점점 더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학부 1학년에서 2학년 여름 학기에 한 지역 교회가 시작한 월요 아침 모임에 참석하는 과목을 수강했습니다. 그들은 주일 출석 인원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기에 사기가 왕성해져 있었습니다. 새신자 등록 카드를 살펴보던 그들은 1년 만에 그날이 “지금까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주일”이었다고 놀라워했습니다.

젊고 야심찬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저는 교회가 어떻게 성장을 추적하고 측정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은 이런 현상이 좋은 일인지 어떻게 아십니까?”고 물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건강한 것은 자라는 법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철학입니다.”

만약 성장하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영적 성장의 신호라는 그분의 발언이 옳다면 고든 콘웰 신학교는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 또한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의 영적 가치가 엑셀 스프레드시트로 결정될 수 없다고 진지하게 믿는다면, 우리는 성장하고 번영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틀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죽음이 삶의 현장이 되고 패배가 승리의 현장이 되는 낡은 틀, 즉 십자가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든 콘웰 신학교가 등록과 예산 면에서 모두 줄어들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자라가고, 영혼이 주의력을 가지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계산기가 계측할 수 없는 비밀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그들의 일을 계속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학교가 필요합니다.

신학교는 오랫동안 목사가 되는 수단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저는 이제 MDiv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MDiv를 마쳤다는 말은 일자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밝혀진 바와 같이, 요즘 복음주의 교회들은 1단계 즉 MDiv에 대해 훨씬 덜 신경을 쓰고 있으며, 목사 지망생들은 신학교는 불필요하고 심지어 아주 나쁜 생각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습니다.

저는 이 조언을 직접 들었고, 논쟁은 대개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왜 신학교여야 하는가? 재정적으로 무책임하고, 탈진할 위험이 있고, 해야 할 공부도 너무 많고...” 맞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만약 신학교가 여러분들을 위해 불공정 거래를 한 것이라면, 저는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직업 사역을 추구하고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평생을 사역의 현장에서 일하기를 기대한다면, 3년제 신학교 프로그램에 전념하는 것이 불합리한 기대는 아닙니다. 의사와 변호사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 여러분의 다리를 잘라내도록 허용하진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학교는 여러분의 직업에 대한 헌신을 공식화하고 소통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학 교육은 목사로서의 소명에 대한 헌신과 인내의 궤적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주의 세계의 일부 사람들은 목회자들의 정식 훈련을 기대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의 기준을 상당히 낮춘 것 같습니다. 스탠리 하우어는 이 이슈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한 목회자가 그들의 구원을 해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한 의사가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있다고는 믿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목회자가 누구인지보다 그들의 의사가 누구인지에 대해 훨씬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경우는, 우리가 아무리 자기 스스로를 심각하게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저버리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은, 신학교 밖에서 목회자를 위한 기초 지식과 목양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의 편리함이 공식적인 신학 교육을 무용지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성경 주석서들조차 신학교 학위만큼 총체적인 훈련을 제공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자기 스스로 하는 연수가 같은 양의 시간과 돈의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비공식적인 신학 훈련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며, 교회에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공인된 신학교들이 제공하는 것 즉 어느 정도의 능력과 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헌신을 확인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고, 보편적인 방법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지름길은 없으며, 그것은 신학교에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많은 연구와 영혼의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학교는 바로 그 훈련을 위한 이상적인 장소입니다. 제나 히츠(Zena Hitz)가 주장하듯, “지적 작업이 요구하는 묵상”이 도피주의의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 그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기 위해 우리의 의제를 제쳐놓을 수 있는 경건한 거리두기 장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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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학교는 영적 성장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평범한 삶이 제공하지 못하는 깊은 주의력과 형성적 고독을 위해 필요한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여, 신학생들이 협력적 환경의 맥락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설명되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많은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씨름하는 영적 시련과 신앙의 위기가 궁극적인 목표 도달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간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냉소주의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이나 환경을 피하려 하면 영적 피곤 현상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목회자의 임무는 고통과 의심을 은근슬쩍 피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그것을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역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무거운 짐과 직면할 때 스스로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Shatov in Demons’ 의 유명한 말처럼, “세상을 정복하고 싶다면, 자신을 정복하라.”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양 떼를 돌보고 싶다면, 여러분의 영혼을 먼저 돌보시기 바랍니다. 끈질긴 공부를 통해 자신을 돌보십시오. 초라함과 교만으로 유혹받을 때 하나님과 씨름하십시오. 여러분의 사역은 언제나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시한 것처럼 목회자들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디모데후서 4:2, 새번역)라는 구절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는 “받은 것을 쏟아붓는” 운하와 “자신을 잃지 않고 넘치는 것만 배출하는” 저수지를 구분합니다. 그는 당시 교회에 저수지가 “너무 희귀했음”을 관찰했는데, 오늘날에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20세기 프랑스의 활동가, 철학자 신비주의자인 시몬 베유(Simone Weil)는 그녀의 책 Waiting for God에서 “기독교 연구 개념의 핵심은 기도가 주의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수학이든 신학이든 학문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도 훈련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거기 앉아 있을 능력 없이, 어떻게 자신의 골방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로마서 12:2) 신학교에 갑니다. 이 변혁의 사역을 통해 목회자들은 세상과 세상의 성공 척도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신학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적 삶과 “성장 신화”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우리가 모든 변혁적 영광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곳은 바로 이 자기 계발적인 과업입니다. 이 막간의 이슈는 완수해야 할 과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학교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고든 콘웰과 다른 복음주의 신학교들의 유효기간 만료를 예측해 보세요.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을 겁니다. 과제를 작성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노아 R. 카거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MDiv 학생이며 글로벌 기독교 연구 센터의 연구 조교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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