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티모시 켈러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로마의 목회자들에게 연설하고, 이탈리아 상원에서 기독교 변증의 대화를 나누고,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학인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 학생들의 질문에 답했다.

사피엔자 대학 바로 옆에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로서, 나는 켈러가 나의 상황과 같은 맥락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내와 나는 그 캠퍼스에서 전단을 배포하고, 피크닉을 열고, 학생들과 교류하며, 몇몇 학생들이 처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도왔다. 2년 전에는, 대학 중앙 잔디밭에 모인 많은 학생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는데, 나는 무신론자인 교수와 대화하며 기독교 신앙을 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켈러가 광범위한 질의응답을 진행하며 학생들의 까다로운 질문에 답하는 동안, 나는 그의 사려 깊은 답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섬기는 자세에 탄복했다. 켈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현지 직원들과 함께 봉사하며 세속적인 이탈리아 젊은이들의 질문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 순간은 많은 유럽 기독교 지도자의 존경을 받던 켈러의 넓고 겸손한 자세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켈러에게서 실용주의와 기술의 시대에 신학적 굳건함을, 분열의 시대에 화해의 정신을, 설교자들이 복음을 감동적인 이야기와 실용적인 조언으로 축소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시대에 복음의 재발견을 찾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복음주의 변증가였습니다” 라고 IVF 전 사무총장 린제이 브라운은 말했다. 켈러의 죽음은 존 스토트의 장례식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2011년에 신학자 크리스 라이트는 스토트를 “서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고 묘사하며 그를 추모했다.

브라운은 “팀 켈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파트너십 정신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성경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진리를 은혜와 자비 가운데 실제 적용했습니다.”

깨어 있는 유럽인들은 켈러에게서 유럽 기독교의 여러 층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조지 휫필드의 신랄한 설교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로부터 형성되어, 존 뉴턴의 복음주의 영성, 네덜란드의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 그리고 C.S. 루이스와 J.R.R. 톨킨과 같은 20세기 중반 옥스퍼드의 작가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1980년대 뉴욕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켈러는, 강해 설교를 통해 도심 교회가 도시 직장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전 세대 런던 목회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존 스토트의 All Souls Church, 마틴 로이드 존스의 Westminster Chapel, 딕 루카스의 St. Helen’s Bishopsgate는 한 세대 후 리디머 장로교회가 유럽인들이 자신의 도시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도록 도왔던 것처럼 켈러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제일 그리스 복음주의 교회의 담임목사인 판지오티스 칸타치스에게 선교적 교회 개척은 새로운 개념이었다. “제 삶과 사역에 있어서 분리나 편의주의가 아닌 의도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양성하는 생태계를 만들고, 그리스 수도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이민자를 섬기기 위해 복음 운동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 이후로 제일 그리스 복음주의 교회는 그리스 전문직 종사자, 이란 이민자, 아테네의 아나키즘 성향 지역인 엑사르케이아에 거주하는 청년 운동가들을 위한 교회 설립을 도왔다.

“하나님께서 뉴욕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와, 그것을 분석한 켈러의 여러 글들은 제가 도시에서 복음 운동에 대한 비전을 개발하고 형성하는데 결정적 영감을 주었습니다”라고 칸타치스는 말한다.

리스본의 침례교 목사이자 펑크 록 가수인 티아고 카바코에게 켈러의 비전과 저서는 문화 참여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카바코는 이미 비기독교 사상가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와 대화 모임을 주최하고 있었다. “켈러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 비록 뉴욕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포르투갈에도 적용할 수 있는 훨씬 더 성숙하고 경험 많은 접근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켈러의 경청하는 자세가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이라고 카바코는 강조했다. “켈러는 유럽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좌절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는 [성공한] 미국인 설교자의 드문 사례였으며, 자신과 다른 지점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수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난 척 하는 태도는 전혀 없었고,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켈러는 동료 미국인들에게 같은 자세를 취하고 세속화되고 있는 유럽과 수적으로 보잘 것 없는 교회라 할지라도 세계 교회로부터 배우라고 격려했다. 유럽 교회 개척자들의 에세이 집인 2018년 자 ‘복음 운동’에서 그는 “우리 문화도 동일한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의해 점점 더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유럽 교회를 주시해야 하며, 그 성공과 실패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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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러의 경험과 겸손은 유럽 지도자들이 전 세계 도시의 차세대를 위한 교회 설립을 준비시키기 위해 켈러가 설립한 단체인 City to City가 주최하는 콘퍼런스를 통해 그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파리 대성당이나 크라쿠프 영화관에서도 똑같이 편안해 보였다.

다른 여러 유럽 지도자도 켈러의 유럽 방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Breccia di Roma church의 목사 레오나르도 드 치리코는 켈러를 “복음주의 군도의 세계적 기준점”이라 칭하며 독자들에게 켈러의 이탈리아에서의 유산을 상기시켰다.

“켈러가 로마에 왔을 때, 도시의 소음과 맛의 향연 속에서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어렸을 때 이민자 가족과 함께 시끄럽고 맛있는 일요일 점심 ‘의식’에 참여했을 때 경험했던 소리의 재점화와 감각의 재활성화 같은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라고 치리코는 썼다.

다른 사람들은 켈러가 자신들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느꼈다.

“팀 켈러는 더블린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더블린의 교회 개척자인 션 멀란은 말한다. “그는 복음이 다른 문화마다 다르게 자리 잡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존중했습니다.”

Ciutat Nova church 개척을 도왔던 사비에르 멤바는 켈러를 통해 바르셀로나에서의 사역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팀 켈러에게서 받은 훈련은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복음의 메시지를 잊지 않으면서도 문화적, 도시적 맥락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켈러는 우리 유럽인들이 훨씬 더 세속적이고 다종교적인 시대의 ‘최전선’에서 서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현실적인 관점일 뿐 아니라 매우 고무적인 관점입니다”라고 암스테르담의 세속적 직업 종사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대화형 전도 방법을 개척한 목회자 팀 브뢰그덴힐은 말한다.

“그는 우리 세대의 신학자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기독교, 즉 규모와 숫자는 훨씬 작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 전파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척자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해주었습니다.”

북유럽 지도자들도 동의했다.

“노르웨이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매료시키기도 하고, 도전하기도 한 팀 켈러가 남긴 풍부한 유산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크리스티안산에 위치한 NLA 대학 부교수 라스 달레는 말한다. “그는 설교자로서는 복음 중심적이었고, 지도자로서는 통합적이었으며, 선교사로서는 전략적이었습니다.”

5월 19일 켈러의 타계는 많은 유럽인들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도시 선교학자, 복음주의 신학자, 전 세계 교회 지도자로서의 켈러의 결정적 역할은 대체하기 어렵다. 그러나 켈러가 형성한 지도자 네트워크는 한 도시에 복음을 전파하려면 많은 교회가 필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복음을 퍼트리기 위해서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전도 사역과 제자 양육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우리 팀은, 켈러의 자료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라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유럽 청소년들에게 접근하는 선교단체인 스타이거의 유럽 대표 루크 그린우드는 말했다. “잃어버린 자를 향한 팀 켈러의 마음과 개인적으로 까다로운 대화에도 기꺼이 참여하려는 그의 의지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견고한 가르침과 신학적 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교회 개척자이자 City to City Europe 리더인 팀 쿠마는 최근 몇 년 동안 켈러가 자신의 사후에도 이 사역이 계속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말한다.

“팀을 보낸 것을 애도하고 앞으로 어떻게 계속 나아갈지 고민하고는 있지만, 저는 팀이 어느 개인도 자신이 했던 일을 똑같이 할 순 없지만, 그가 시작한 일을 우리 모두가 함께 더 많이, 더 깊게 발전시켜갈 수 있도록 준비하며 떠날 준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René Breuel은 로마 호페라 교회의 창립 목사이자 ‘행복의 역설’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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