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사들이 복음을 현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안고 1880년대 한국에 도착했다.

이 시기는 개신교 선교의 황금기였고, 선교 기록에는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영적 분위기에 대한 자세한 특징이 담겨 있었다.

선교사들은 그곳에서 종교적인 삶의 증거를 거의 찾지 못해 당황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한국에서 유교는 단지 삶의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지침 역할만을 한다고 생각하여 비종교적인 나라로 한국을 정의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삶에 정착하면서 곧 무속신앙이 한국의 핵심 신앙임을 깨달았다. 미국 선교사 호머 B. 헐버트는 그곳에서 관찰한 애니미즘을 믿는 자들에게 자연 숭배 관습에 ‘영적 예배(sprit-worship)’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동료 선교사 조지 헤버 존스는 한국에는 무속과 불교, 유교가 혼합된 종교적 현상이 풍부하다고 평했다.

존스는 ‘한국교회의 부흥’이라는 기록물에 무속신앙은 한국인의 영혼에 ‘호소’했고 “두려움으로 영감을 주었다”며, “불교는 존경으로 한국인의 마음에 호소하고 영감을 주었고, 유교는 존경과 추앙으로 그들의 마음에 호소하고 영감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러한 선교사들은 무속신앙이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고 맥락화하는데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무속신앙을 통해 한국인의 영적 세계에 대해 깊이 인식했고, 이로써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여성 무당들의 영적 힘과 권위는 한국에서 ‘여성 전도자’와의 유대감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어떻게 한국에 정착했는가?

한국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국내 학자들이었다. 1700년대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천국의 참 의미’를 중국어로 연구해온 현지 젊은 학자들의 모임에서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1784년 한반도로 돌아와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성장하면서 이 신앙을 공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도 커졌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박해와 순교가 시작되었으며, 1866년 대한제국의 대원군 치하에서 가장 심한 박해가 일어났다. 이후 명성왕후가 1874년 퇴위 후 외세와 조약을 맺어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기독교는 그 이후로 한국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2015년 전국 인구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은 개신교, 8%는 천주교였다.

그러나 무속신앙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널리 강력하게 퍼져 있으며, 매년 약 50,000개의 무속신앙 관련 의식이 성대하게 서울에서 열린다.

뿌리 깊은 애니미즘

무속신앙은 인간이 조상의 영혼이나 나무나 달 같은 사물 등 다양한 영혼과 교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민속 신앙이다. 시베리아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10세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에 존재했으며, 누가 무속을 한국에 들여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고학 자료를 통해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무속신앙이 존재하지만, 한국의 무속신앙은 무속인들이 입는 복장, 영혼과 교류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과 소통하는 방식 등에서 독특한 차별점이 있다. 대부분의 전 세계의 무당들은 무아지경에 빠지고 영혼이 그들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영혼 세계와 접촉한다. 그러나 한국의 무당들은 영혼들을 그들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한다.

무당이라고 부르는 여성은 굿을 하며 노래와 춤을 추어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제물을 준비한다. (박수무당이나 남성 무당도 존재하지만 주로 여성이다.)

이러한 의식을 하기 위해 무당은 장식된 화려한 무지개 무늬 의상을 입는다. 그들의 역할은 굿을 통해 아이의 이름을 고르는 것이든, 상서로운 혼례 날짜를 선택하는 것이든, 풍년을 가져오는 것이든,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명확한 답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다른 세상과의 접촉

한국의 무속신앙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세상에 수많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이러한 측면을 이해했다.

헐버트는 ‘한국 민화’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영혼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문고리나 젓가락도 한 사람의 전체 운명을 바꿀 힘이 있는 영혼이 머무는 곳일 수 있다.”

무속신앙을 통해 이러한 개념들이 이미 그들의 세계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영적인 세계의 존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외국인이 무속 신앙을 침입한 것으로 보았고, 결국 천주교와 개신교 선교사들도 무속신앙에 대해 크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주로 유교와 대립했던 반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샤머니즘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무속신앙을 처음 접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무당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한편 동료 미국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러는 무속신앙은 단지 미신을 믿는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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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안에서 기도하다

1907년 평양 대부흥기는 이러한 선교사들이 무속신앙과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1897년부터 1906년까지 한국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지배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으로 떠들썩한 정치 상황을 맞닥뜨렸다. 러일전쟁(1904~1905)은 한국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한반도 전역으로 퍼진 평양부흥은 이런 아픈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전국적인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대규모 고백과 회개, 구마와 치유, 격렬한 단체 기도 등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은 큰 소리로 우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청중들이 함께 크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혼란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함성과 영성의 조화되고 거부할 수 없는 기도가 쏟아져나와 감동받은 이들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라고 미국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는 말했다.

이러한 부흥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의 영적 세계를 인식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때 구마나 치유 사역에 극도로 비판적이었던 일부 선교사들이 부흥회를 통해 태도를 바꿨다고 역사학자 옥성득이 기록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중단주의적 견해를 버리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영적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개신교가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무속신앙의 역할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 찰스 A 클라크는 “ 1900년 전처럼 사탄이 이제 이곳에서 하나님과 대립하여 영적 활동을 방해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한국어로 명명하다

한국에서 ‘하나님’이라는 고유의 이름을 정하는 것 또한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일부 선교사들은 무속신앙에서 가장 높은 신이나 ‘천국의 왕’을 지칭하는 하님(하나님)과 같은 전통적으로 신성한 이름을 채택하는 것을 옹호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고유의 한국어 단어를 사용하면 기독교의 일신교적 관습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미 신들과 다른 영혼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는 비판적으로 상황화하려고 시도했다.

언더우드와 같은 다른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무속 뿌리라는 용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느꼈다. 그가 제안한 대안적인 단어나 이름으로는 진정한 신을 뜻하는 ‘참신’이나 ‘높은 군주’라는 뜻의 샹쥬 등이 있었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 역시 무속적 맥락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구약의 바알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모든 예배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천국의 화신이며, 이는 구약에서 말하는 바알과 거의 동일한 위대한 천국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이 성령의 능력과 결부지어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한국인들은 기독교적 메시지에 흥미를 갖게 됐다.

미국의 사무엘 모펫 선교사는 현지 시장에서 설교하면서 성령이 다른 모든 영혼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소했다. 그는 “나는 당신들의 악한 영혼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성령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선포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어떤 영혼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하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모펫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한국의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가교로 삼아 효과적으로 선포하며 현지인들을 전도했다. 악귀를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해방과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메시지는 지극히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삼위일체를 깨닫다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의 무속신앙에 영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단언하며 더 나아가 이들이 기독교 복음의 불완전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한국의 건국 설화인 단군 신화가 삼위일체적 관점과 현저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창조자’)은 신의 인도를 받지 못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돕기 위해 아들 환웅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낸다. 환웅은 곰인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고, 단군은 대한제국을 세운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는 단군 신화를 기독교 일신교와 삼위일체 신학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환인은 창조주 하나님, 환웅은 성령, 단군은 환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한다고 1902년 한국 왕립아시아학회지 『한국민화』에 기록했다.

헐버트 같은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진리로 내세우기보다는 기독교와 한국 문화의 접점을 찾고자 했다. ‘나와 신학이나 철학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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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이 단군신화를 실제로 믿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오크는 “현대 한국의 새로운 종교인 개신교의 문화신학적 계보를 해독하는 출발점”이라고 기록했다.

여성의 영역

한국 무속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주로 여성들이 무속 행위를 주도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이를 ‘여성의 종교’로 보았다는 점이다. 여성 무속인들은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에게 신앙을 전했고, 최고의 교육을 받은 계층에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무속인들을 불렀다고 미국 선교사 J.R. 무스는 전했다.

그 결과 여성 무당들은 한국의 그 어떤 계층의 여성들보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의식을 수행하고 영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영적인 힘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들의 힘은 한국 주택구조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을 일컫는 곳인 ‘안방’에서 보여진다. 남성이나 외국인 선교사는 출입할 수 없는 이 사적인 공간에는 한국 여성들만 초대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여성들이 권한을 행사하였다.

당시 여성들은 공적으로는 힘이 없었지만 안방이라는 친밀한 영역에서는 사적인 힘을 가졌다. 무당, 주부, 그리고 쉴 수 없는 영혼들의 저자 로렐 켄달은 “여성 무속인들은 한국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카타르시스적 보상을 제공하고 한정적으로나마 해소시켰다”라고 기록했다.

이곳에서 여성 무당들은 집안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의식과 영적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안에 있는 영들을 소생시켰다. 켄달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악령을 쫓아내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가신들을 달래고, 갈 곳 없는 가족의 영혼을 지옥에서 해방시켰다.

이러한 공간에서 행해지는 무속 의식(굿)은 여성들이 을 풀고 영적인 힘을 ‘재충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한’은 지속적인 억압과 정당화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은 억울함, 고통, 분노와 슬픔을 깊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 유형의 굿이 대표적으로 행해졌는데, 이는 치유 굿, 번영 굿, 장례 굿이다. 굿을 통해 한을 푼 여성들은 종종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치유를 경험했다.

말씀으로 충만해지다

한국의 여성 무당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전도자’들도 중재자, 치유자, 구마자, 영적 멘토 등의 역할을 했다.

기존 사회 규범에서 여성 무당을 가정 내의 종교적 권위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전도자나 여성 전도자들은 한국 가정 내 진입 장벽이 낮았다.

이 여성 전도자들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내 개신교 선교 초기가 끝나갈 무렵 선교단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여성 전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동포들과 열정적으로 공유하고 여성들의 문해력과 역량을 증진시켰다.

종교학자 엘렌 스트론 리는 “한국에서 여성 전도자들이 복음화 작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안방이라는 개념을 활용하고 안방 내 다른 여성 종교인, 특히 여성 무당의 권위를 차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 전도자들은 기도하고 시편을 전했다. 사람들이 악한 영의 노여움을 달래다가 지칠 때 그 집착 내려놓고 불태우라고 전하는 것이 바로 여성 전도자들의 역할이었다. 그들은 악령을 내쫓을 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열렬한 기도를 하도록 요청받았다.”

한국의 여성 전도자들은 육체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영적 욕구를 채워주고, 내면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그들이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본 여성 무당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미국 선교사 J.R.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한 여성 무속인이 복음을 전하는 여성 전도자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 여성은 성령을 수많은 다른 영혼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로 이해했다고 한다.

새로 개종한 몇몇 전직 무속인들은 여전히 약초를 사용하고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치유를 기도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의식 가운데에도 성령에게 기도했다. 영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령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현지화된 믿음

오늘날 한국 문화에는 여전히 무속신앙이 존재하고 있으며, 무당은 이러한 민속 신앙의 계승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자신들이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무속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속신앙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이 종교적 혼합주의, 즉 다양한 종교적 신념과 관습의 융합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 한국 내에서 공론화 된 적은 없었다.

선교 기록에는 연속적인 한국의 영적 구조에 관하여 선교 현장에서 보여진 두 가지 원리가 드러난다.

첫째, 한국인들은 다양한 영혼의 편재성을 인정하는 영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미 그런 개념이 존재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영적 세계의 존재나 하나님의 전능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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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무속신앙을 실천하지 않더라도 영혼의 존재는 한국인들의 인식 속에서 강한 통제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적 세계의 인식과 개방성은 기독교에 대해 공유할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제공했다.

일부 신학자와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 내에 무속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교리적 정통성을 희석시킬 것을 우려해 비판했다. 그러나 과거와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에서 기독교의 급속한 확산을 촉진했고 그곳에서 독특하고 현지화된 형태의 신앙이 생겨났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는 평양 부흥의 정신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집단기도(일명 통성기도), 새벽기도회, 기도원 방문 등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치유와 구마를 실천하며 창의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무속신앙은 기독교가 한국 문화에 동화되고 현지화 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열어주었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 시대에 발맞추어 신앙을 맥락화하기 위해 무속 신앙을 성공적으로 활용했지만, 그 노력의 결과는 혼합주의가 아니라 현지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실천하는 지속적이고 현지화된 기독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수진 미국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 실용신학과 조교수이다.

Translated by Jennifer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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