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스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도할 때마다 우크라이나의 매서운 겨울 날씨로 인해 그의 입에서는 입김이 난다.

그가 단순히 헤르손의 한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그에게 생명줄이다. 러시아가 쏜 미사일에 교회 벽을 흔들릴 때도, 목사의 네 살배기 아들이 울 때 그는 쉬지 않고 큰 소리로 기도한다. 빵을 근처 마을로 가져다주기 위해 운전하기 전에도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한다. 종종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한다.

12월의 어느 화요일 추운 아침, 제임스(가명으로 기재해달라고 요청함)는 먼지 묻은 노란 밴의 운전대를 잡고 우크라이나어로 기도했다. 그는 현지인들이 흔히 ‘섬’이라고 부르는 진흙투성이 드니프로강을 따라 인공섬으로 이어지는 다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러시아의 포격으로 그곳의 작은 교회의 창문 몇 개가 산산조각이 났고, 제임스는 합판으로 부서진 창문을 막았다.

이 섬은 빈번히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다. 강 바로 건너편은 아직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헤르손 주의 동쪽 부분이 보인다. 수만 명의 러시아군이 수도 헤르손을 탈출해 황급히 후퇴하던 지난 11월부터 매일 복수를 하듯 강 건너편에 로켓과 수류탄, 탱크포탄, 박격포 등을 투척하여 이곳에서만 매일 1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있다.

오늘은 그의 차례일까?

그러나 누군가는 교회 창문을 수리해야 했다. 섬의 인구는 원래 30,000여 명이 되는데 이 중 약 4분의 1 정도의 주민만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어 대피하지 못했거나 이곳에 남기로 고집한 이들이다. 섬에서 피난처와 보급품을 제공하는 곳은 교회가 유일하다. 그래서 제임스는 목숨 걸고 이 다리를 건넜다.

우크라이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마지막 날’을 요한계시록에 적힌 먼 종말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삶에서 연기, 폭발, 잦은 정전을 마주하며 진실을 마주한다: 우리는 여기에 잠시 있을 뿐이고, 내일은 이 땅을 떠날지도 모른다.

헤르손의 섬에 있는 교회에 우크라이나인 목사와 자원봉사자들이 합판을 가져다준다.
Image: CT 기사를 위해 조엘 카릴렛 촬영

헤르손의 섬에 있는 교회에 우크라이나인 목사와 자원봉사자들이 합판을 가져다준다.

러시아가 헤르손을 점령하자 제임스 부부는 “우리가 죽는다면 함께 죽는다”고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도시에 남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가장 어린 네 살배기부터 17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포격이 5층 아파트를 젠가 블록처럼 흔드는 모습, 둘째 딸이 비명을 지르며 아이들을 모아 교회로 달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남기로 한 것은 어렵지만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제임스는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서 절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내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이나 유럽으로 도망친다면 누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겠습니까?”

3주 동안, 그들은 교회 계단 아래에서 잤다. 약 300명의 사람이 교회 지하에서 몇 달 동안 피신했다. 사람들은 앉아서 자기도 하고 남자 화장실에서도 잤다. 생후 8개월 된 아기를 둔 가족은 5피트짜리 높이의 옷장 안에 끼어서 생활했다.

제임스는 겨우 1년 전 이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임스가 러시아 점령지에 가족과 함께 남기로 선택한 것은 특별하다. 보통 최전선에 있는 우크라이나 목사들, 특히 어린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 함께 떠났거나 가능한 한 오래 머물렀지만 결국 떠나갔다.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오늘, 떠난 많은 목회자는 돌아갈 교회가 없다. 그들의 신도들은 흩어졌고, 교회 건물들은 파괴되었으며, 전쟁으로 고통 겪은 신도들은 목사들이 돌아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고아 목사’라고 부른다”고 세계 최대 개신교 단체인 우크라이나 침례교 연합 회장인 발레리 안토니욱이 말했다. 안토니욱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2,100여 명의 침례교 목사 중 약 200명이 대피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약 200명 이상이 군 복무에 소집되었다. 많은 사람이 다른 교회로 재배치되어야 했지만, 대피한 사람들의 절반은 돌아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와의 재통합이 “고통”이라고 안토니욱은 말했다. 위기 상황에서 목회자들이 떠난 것에 대해 원망하고 상처받은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사역을 계속하는 것을 걱정하는 교인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많은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남아 있던 일부 목회자들이 러시아군에 체포·협박·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들이 신도들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파벨 스몰야코프는 헤르손주의 침례교 교회의 목사이다. 그가 다니는 교회인 갈보리침례교회는 헤르손에서 대표적인 교회이다. 침략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갈보리침례교회는 지역 보육원에서 4개월에서 네 살까지의 고아들 46명을 데리고 왔다. 러시아군이 그 지역을 폭격하고 있었기에 이 보육원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교회는 아이들을 지하에 피신시켜 보호했다. 교회 성도들은 아이들을 먹이고, 청소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왔는데, 그들 중 어떤 아이들은 특별히 24시간 돌봄이 필요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필요한 약, 우유 및 기타 유아용품을 조달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도시 전역에서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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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야코프는 불안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다. 러시아 군인들은 아이들을 전쟁을 선전하는 데에 사용하려고 했다. 지속적으로 관계자들은 교회 문을 두드렸고, 직원들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누가 이곳의 책임자인지 왜 그들은 이 고아들을 데리고 있는지 추궁했다.

그리고 부활절 일주일 전이었던 어느 날, 아침에 제복을 입은 러시아 관리가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 나타나 스몰야코프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남아 있는 보육원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데려가거나 그러지 않으면 군인들이 고아들을 강제로 데리고 가겠다고.

목사는 아이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고, 예상했듯 목사는 위협을 받았다. 스몰야코프는 그의 사진이 러시아 TV에 나왔다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인신매매범으로부터 고아들을 구조했다고 주장하며 그와 교회가 미국 암시장에 아이들의 장기를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다. 스몰야코프는 “그때부터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4일에 걸쳐 러시아 검문소를 피해 오데사로 몰래 빠져나갔다.

헤르손주 주지사가 보낸 텔레그램 게시물을 통해 마지막으로 목사가 들은 소식에 따르면, 아이들은 러시아가 무력으로 합병한 크림반도 지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스몰야코프의 이야기를 듣다가 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한 젊은 목사인 우리 쪽 통역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닦았다.

스몰야코프에게는 여전히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지금 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많은 우크라이나인과 마찬가지로 대피하기로 선택한 우크라이나 사역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들은 남겨진 사람들을 걱정한다. 한 목사는 러시아군이 주일 예배 도중에 교회를 폐쇄하고 집을 샅샅이 뒤져서 지난 9월 점령당한 도시를 탈출했다고 했다. “그것이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대피했지만 노인 200여 명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아직 점령지에 있는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익명을 요구한 이 목사는 현재 사실상 노숙자가 돼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자신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처럼 일종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온라인에서 우크라이나와 전 세계로 대피한 교구민들과 매일 접촉하고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는 점령당한 국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역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15개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위한 목사가 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제임스의 교회에서는 장로 5명 중 3명이 헤르손을 떠났다. 찬양대, 주일 학교 교사, 청년목회자 등 목회 지도자 대부분이 사라졌다. 침략 초기 교회에는 수십 명의 봉사자가 지도자들의 일을 대신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자, 더 많은 사람이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배고프고 절망적인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모였을 때, 제임스는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몇 달 동안 전기도, 더위도, 물도 없이 유난히 추운 겨울을 견뎌왔을 주변의 외딴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가 돕지 못한 점이 마음이 아프다.

헤르손 교회에서 음식을 배급하는 모습
Image: CT 기사를 위해 조엘 카릴렛 촬영

헤르손 교회에서 음식을 배급하는 모습

그리고서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주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한결같은 교회 자원봉사자들을 본다. 그는 오늘 감당할 일을 하기에 충분히 채워주셨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그들의 존재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시편 23편의 막대기와 지팡이와 같다.

전쟁 초기부터 제임스와 함께하며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도운 20대 두 청년이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들은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둘 다 러시아인들의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해 이름을 밝히지 않기를 요청했다).

헝클어진 짙은 수염과 열정적인 눈빛, 검은 청바지를 입고 ‘간달프’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40대 제임스는 그들과 묘한 삼인조가 된다. 그중 한 명은 끊임없이 제임스 목사를 놀리며 농담을 한다. 다른 한 명은 붉은 머리카락 색에 안경을 썼고, 단 것을 좋아하는 날씬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사려 깊은 사람이다.

이들은 교회 지하에 있는 얇은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자고, 두 청년이 돌아가며 밤에는 위층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교회를 지키는 자 입니다.” 청년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도 헤르손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난 화요일, 섬이 있는 교회에 합판을 가져다주기 위해 제임스와 동행했을 때, 그 청년 두 명이 함께 탔다. 목사의 오래된 밴에는 뒷좌석이 없어서, 청년들은 흔들리는 플라스틱 아동용 의자에 앉아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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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아처럼 신도 없이 남겨진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신도들이 떠난 교회 건물도 그렇게 홀로 남겨져 있다. 그 교회의 목사는 침략 첫날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 그 교회의 신도들 대다수도 도망쳤다.

제임스는 공식적으로는 목회자 자격이 없는 음향 엔지니어 교인 한 명에게 이 교회의 리더쉽 자리를 맡겼다. 엔지니어 네보드(가명)는 길 건너 아파트에 산다. 러시아의 미사일이 자신이 일하던 공연장을 파괴했을 때, 그는 방공호 및 사회봉사센터를 겸하는 교회 건물로 피신했다.

그가 어느 날, 발전기를 끌어와 건물에서 600대의 휴대 전화를 충전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포격 중에도 약 200명의 사람들이 지하에 대피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갔을 때 제임스는 “이제 네보드는 목사입니다.”라고 말했다.

네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가 격하게 부인했다. “목사는 아니고 자원봉사자입니다.”

“맞아요, 당신은 목사입니다.”라고 제임스가 재차 말했다. 제임스가 구글 번역기에 우크라이나어를 입력하고 나에게 그의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희생하는 사람”라는 단어가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제임스가 네보드를 향해 손짓했다. “네보드는 이곳에서 9개월 동안 무보수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습니다.”

9개월. 러시아가 헤리손을 점령한 기간. 그 상황에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수많은 일을 겪었다.

헤르손은 침공 이후 전쟁이 시작되자 거의 곧바로 몰락한 최초의 핵심 도시이자 러시아군이 점령한 유일한 지역 수도다. 한때 풍요로운 농업 토양을 가진 번창하고 경제적인 중심지였던 도시는 하룻밤 사이에 유령 마을이 되었다. 몇 달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 안에 숨어 지냈고, 필수품을 찾으러 나갈 때만 잠시 서둘러 나갔다. 이른 오후 시간에도, 거리는 떠돌이 개들만 돌아다닐 뿐 텅 비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심리를 가지고 논다”고 한 목사는 나에게 말했다. “러시아는 영원하다, 만세!”라고 빌보드에 몇 달간 예고했고, 결국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믿기 시작했다.

11월 11일, 시민들이 춤추며 거리에서 셀카를 찍으며, 파란색과 노란색 깃발을 들고 우크라이나 탱크와 함께 헤르손 시내를 행진했다. 제임스는 처음에는 도시가 정말 해방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러시아인들이 이번에는 어떤 속임수를 쓰고 있나 의심했다. 이전에도 러시아 군인들은 친우크라이나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민간인 또는 우크라이나 군인 복장을 했었다.

그는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축하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생수와 빵을 받으려고 이미 교회에 줄을 서 있었다.

러시아군은 후퇴하며 그 지역의 중요한 기반 시설을 파괴했다. 약 3주 동안 전기, 수도, 난방, 전화 서비스가 없었다. 해방의 첫날이 끝날 무렵, 거리가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에 7,000여 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교회 밖에 줄을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러시아가 점령했던 시기보다 해방된 이후 헤르손의 도시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지난 12월 초 방문했을 때도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다. 상점들, 은행들, 식당들, 학교는 여전히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직업이 없었다.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의 그네가 흔들리고 있었다. 오후 7시 30분, 통금시간 이후의 도시에는 불안한 정적이 흘렀고, 또 강 바로 건너편에서 산발적인 폭격이 밤새 들려오며 도시를 뒤흔들었다.

헤르손 정부에 따르면 이 섬을 방문한 날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민간인 지역을 공격하며 헤르손에게 51차례 포격을 가해 2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그날 오전 10:20 A.M.에 첫 번째 포격이 들려왔다. 제임스와 네보드는 교회 밖에서 구호 물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고, 노인 한 명과 임신한 두 여성이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다. 러시아가 쏜 거대한 로켓의 폭발 소리가 꽤 가까이에서 들렸을 때, 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이가 많은 여성이 어린 여성을 두 팔로 감쌌고, 그들은 네보드와 함께 서둘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밴이 있는 방향으로 제임스가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갑시다!”

우리는 모두 그의 밴에 뛰어들었다. 제임스는 가속 페달을 밟았고, 우리는 교회가 있는 섬 지역을 벗어나 다리를 건넜다.

러시아 탱크가 학교에 총을 쏘고, 러시아 군인들이 식당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동안 아이들은 굶주리고 있고, 러시아인들이 헤르손의 농부들로부터 농작물과 장비를 약탈하는 등 수많은 나쁜 일들을 제임스가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그가 손을 꽉 쥐었다. “이건 집단학살입니다.”

교회로 돌아가는 길에, 제임스는 짓밟힌 모래성처럼 보이는 시내 건물을 가리켰다. 우크라이나군이 미군이 보급한 히마스 로켓포를 발사해 파괴하기 전에는 러시아 기지였다고 말했다. 목사는 이를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아요,” 그는 영어로 소리쳤다. “히마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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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은 단지 점령지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모든 지역을 표시했다.

인구가 밀집한 키이우 교외 비쉬네브의 어느 토요일 저녁, 겨울이라 낮이 짧았다: 오전 8시에 하늘은 쪽빛으로 남아 있다가 오후 3시가 되자 어두워졌다. 다가오는 눈보라의 두꺼운 구름이 어렴풋이 보였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전력망을 공격함에 따라 연속적으로 돌아가며 정전상태가 되어 도시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침략 당시 인구 42,000명이었던 이 도시는 중세 유럽 마을처럼 어두웠다. 가로등과 건물 표지판이 꺼져 있었다. 아파트 건물들은 발전기가 있는 여러 개의 유닛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을 제외하고는 무색의 정육면체처럼 보였다. 차량 헤드라이트가 눈길에 비추자 보행자들은 헤드램프와 손전등을 갖고 빙판인 인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꽁꽁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 구원교회(Salvation Church)는 오아시스처럼 빛이 나고 북적였다. 커피와 구운 빵들이 공기를 따뜻하게 했다. 도시가 정전된 시간 동안 전력을 제공하는 비쉬네브의 유일한 공동체 건물이 바로 이 교회이다. 매일 식당과 지하실 등이 청소년수련관을 열어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몸을 데우고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했다.

키이우 오블라스트는 러시아 군대가 수도 주변의 주요 도시들을 급습했던 침략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 먼 길을 돌아왔다. 지난해 말 어느 일요일, 교회가 성도들로 가득 찼다. 목사들은 새 신자들을 세례 수영장에서 세례주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지뢰, 버려진 탱크, 시체들이 있는 폐차장이었던 키이우 외곽의 마을 보르젤에 있는 새 교회에서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상점들과 약국들 그리고 커피 가판대가 열려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맥도날드에서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핥았고, 할머니들이 아기들을 유아차에 태웠다.

구원교회에서는 운동복을 입고 커다란 흰 깃털을 들고 있는 소녀들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위해 춤 동작을 연습했다. 그들은 사방에 예수가 왕이라는 문장이 새겨진 천장 아래에서 반짝이는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저기 있는 가장 큰 아이가 제 딸이에요”라고 미콜라 사브추크 목사가 가리키며 말했다.

사브추크에게는 15살 딸과 13살 아들, 두 자녀가 있다. 침략 둘째 날 러시아 탱크가 집에서 가까운 도시에 쳐들어온 것을 보고, 그는 곧바로 가족을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는 부모에게 아이들을 데려다주었다. “아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사브추크은 주일 예배에 맞춰 키이우로 돌아왔다. 지난 4월 러시아군이 철수하자 부활절에 가족을 집으로 데려왔다.

일상이 점차 회복되고 있습니까?

사브추크는 “겉보기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국가적으로 겪은 심리적 트라우마의 정도를 가늠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전쟁 전에 우크라이나의 삶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크고 작은 변화, 일상적인 생존의 기적을 통한 회복력, 끈기, 그리고 일상의 통제 등으로 인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는다.

왼쪽 : 성도들이 키이우 외곽의 보젤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다. 오른쪽: 비쉬네브의 키이우 교외에 있는 구원교회 주변의 거리가 한산하다.
Image: CT 기사를 위해 조엘 카릴렛 촬영

왼쪽 : 성도들이 키이우 외곽의 보젤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다. 오른쪽: 비쉬네브의 키이우 교외에 있는 구원교회 주변의 거리가 한산하다.

전쟁 초기, 구원교회는 교인 3,000명 중 90%를 잃었다. 절반은 해외로 대피했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 서부로 대피했다. 2월 24일의 침공 이후 첫 주일, 사브추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지 궁금해하며 강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300여 명, 약 10퍼센트의 교인이 참석한 것을 보고 놀랐다. 교회 내 16명의 목사 중 절반이 대피했다. 사브추크는 남아 있는 리더들의 정신력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떠나라고 충고했다.

사브추크는 헤르손의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며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끊임없는 불확실성은 고통을 수반한다. 사브추크는 침략 5일 만에 그 충격으로 인해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오열했다.

하지만 한탄한 시간도 있었지만, 행동해야 할 때도 있었다. 약, 음식, 공급품 등이 당장 시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피난처가 필요했고, 대피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했고, 교회가 원조를 제공하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교회 문을 두드렸다.

신도들과 목회자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불신자가 교회로 오고 있다고 말한다. 구원교회는 주일예배에 10분 분량의 설교에서 새신자를 위한 기본적인 복음을 설명했다. 사바추크는 매주 일요일 20~40명의 신입들이 교단의 전화에 응답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원교회는 평소에도 전도를 중시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절박함이 더 커졌다고 했다. “인생은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봐야 한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은 매우 특별한 시기이다”라고 발레리 안토니욱 침례교 회장이 말했다. “이런 시련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를 배가시키시는지 알 수 있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하나님을 본다. 수확할 시기가 올 것이다. 지금은 씨를 뿌리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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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사역자 중 특히 외상 치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안토니우크에 말에 따르면, 침략 전에도 침례교에 관련된 500여 명의 목회자가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신학교에 지원하려고 고민했던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역자들이 ‘2년이라는 단기간 안에 훈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르핀에서 열린 침례교 전략회의에서는 전국에서 목회자와 리더쉽 200여 명이 모여 전쟁이 자신들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했다. 피로한 여정이었지만 큰 감동도 있었다. 전시에 사역에 대한 어려움이 있지만, 사역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우리는 사역 중이다.”라고 안토니욱은 회의가 끝나자 그들에게 말했다. “전쟁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그때가 2023년이면 받아들이자.’”

르손 해방 이틀 만에 파벨 스몰야코프가 갈보리침례교회로 곧장 향했다. 러시아 언론에 그가 고아 밀매범이라고 보도된 후, 그는 부활절 일주일 뒤에 오데사로 대피했고, 7개월 동안 헤르손에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곳까지 운전해서 가는 도로는 참혹했다. 지뢰밭과 거리에 훼손되지 않은 채 놓인 시체들 사이로 차를 운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신도들과의 재회는 즐거웠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스몰야코프가 마침내 그의 아파트에 들어갔을 때, 이상할 만큼 고요하게 느껴졌다. 침대 시트, 머그잔, 익숙한 주름과 장식품 등 모든 것은 정확히 반년도 전에 그가 두고 온 그대로 놓여있었다. 마치 바깥세상이 바뀐 사이, 집 안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 같았다.

스몰야코프는 “돌아온 사람들과 떠나지 않은 사람들 모두 엄청나게 바쁘다”고 말했다. 지역 지도자로서 그는 지친 사역자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자들을 돕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그는 경고한다. 많은 교회가 흩어졌다. 교인 400명 중 4분의 3이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역에 흩어졌다. 6명의 목회자 중 스몰야코프만이 헤르손에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령 기간 내내 갈보리교회에 남은 교인들은 여전히 매일 아침 10시에 함께 모여 기도했다. 사도행전 2장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매일 모여 빵과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날이 갈수록 많은 것을 더하셨다.

최근 갈보리교회에는 300명의 새신자들이 등록했다. 스몰야코프는 “지도자와 성도들이 달라져 낯선 교회로 돌아왔을 때는 힘들겠지만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행복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르손에 있는 제임스의 교회도 전쟁 전과 같은 상황으로 회복되지는 않았다. 성도 400명 중 50명만 남아 있다. 이전에는 주일예배 때마다 150명 되는 아이들의 웃음으로 채워지곤 했다. 이제 겨우 20명만이 남았다. 매일 러시아의 포격을 겪으며, 제임스는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몇 주 전, 내가 방문했을 때 그는 나를 어둡고 추운 예배당에 데려다주었다. 화려한 무대 조명과 미디어 장비가 있는 큰 강당이었다. 한때는 유명한 공연을 했던 큰 무대이기도 하다. 이제 더는 미디어팀은 없다. 연극팀도 떠났다. 드럼이나 기타를 연주할 사람이 없다.

지난 12월, 그들은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에게 활기찬 크리스마스 공연을 선보였다. 제임스는 2022년 당시, 제임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예배에 참석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녹음된 찬양곡을 연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임스 주변 교회 곳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이 든 여성들은 배급을 위해 쌀을 작은 자루에 부었다. 식당을 잃은 요리사가 아내, 장모와 함께 교회 부엌에서 배추와 으깬 감자를 끓였다. 제임스의 아내는 종일 바삐 아이들을 홈스쿨링하며, 배고픈 사람들을 섬기며 뛰어다녔다. 12명의 자원봉사자가 교회 창고부터 배달 트럭까지 줄지어 서서 연결해 다른 교회에서 기부한 음식 가방을 모두 함께 내렸다.

밖에서는 러시아 로켓의 폭발하는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고, 자주 울리는 소리에 교통 경적처럼 배경으로 흐려졌다.

“예전의 예배가 그립나요?” 내가 물어봤다.

“아니요.” 제임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전에는 모두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지만 이제 우리는 복음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제임스는 젊지만 동시에 노쇠했으며, 활기차지만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작년에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었지만, 아마도 그가 말하는 기도의 힘으로, 어떻게든 활기찬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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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방문을 짧게 끝낸 후 제임스가 헤르손의 섬에서 차를 몰고 돌아왔다.
Image: CT 기사를 위해 조엘 카릴렛 촬영

교회 방문을 짧게 끝낸 후 제임스가 헤르손의 섬에서 차를 몰고 돌아왔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고 계신다. 언젠가 한 마을에 음식과 물자를 배달하던 중, 불과 몇 분 전 자신이 지나간 길에서 러시아 탱크가 차량 여러 대를 들이받은 적이 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전했다. 자신의 아내가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게 될 뻔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나아가기만 했다.

그와 이야기하는 도중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생후 7개월 된 아이를 생각했다. “헤르손에 남은 것을 후회하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후회요? 아니! 아니요! 절대!” 제임스가 말했다. “우리는 최전선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께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옆에서, 그의 오른팔과 같은 사역자 한 명이 농담을 했고, 다른 한 명은 킥킥거렸다.

제임스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는 눈은 찡그리며 웃었다. 최전방에 있게 될 줄 몰랐고, 이것들이 그의 마지막 날들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기꺼이 교회와 함께 웃으며 살아갈 것이다.

저자 Sophia Lee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글로벌 스태프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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