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해 집단으로 봉기했다. 비록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 봉기는 민족주의를 통해 한국인들을 활기차게 하여 하나로 묶었으며, 그 운동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되었다. 지금은 매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이날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들도 이날을 기념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 공동체가 그들의 참여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 한국에 있던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은 공식적으로 이 운동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또한 이 운동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

일제 강점 초기

호레이스 알렌과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시작으로, 미국 개신교 장기 선교사들이 1884년부터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최초의 한국 주재 선교사였고, 언더우드는 1911년 성경 전체를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는 것을 감독했다. 헨리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의 기초를 닦았고, 메리 스크랜턴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로 불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첫 번째 여자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들이 접한 한국은 공식적으로 조선왕조로 알려진 독립 왕조였고, 그 군주들은 1392년부터 한반도를 통치해왔다. 그러나 20세기로 전환된 무렵, 유교(Neo-Confucian)에 바탕을 둔 왕조는 근대화된 일본의 공격을 받았다.

한국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왕조를 전복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10년에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다. 그러나 선교 사역은 계속되었고 1919년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 1명과 로마 가톨릭 선교사 52명 외에 개신교 선교사가 329명이나 되었다. (한국인들은 1700년대 말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개신교 선교사의 대부분은 미국인이었고, 영국인 선교사와 호주 선교사도 일부 있었다. 1919년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전체 한국 인구의 2% 미만이었다. 그들 중 약 20만 명은 개신교도였다.

누가 한국에 복음을 가져왔을까? 한국인이 직접했다.

초기부터 선교사들은 포교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정치적 활동을 삼갔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의 근대화, 특히 교육과 의학 분야에 큰 도움을 줬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의 개혁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을 때, 한국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일본의 통치를 따랐다. 약 1만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폭력적인 19세기의 영향으로 인해, 대부분의 한국 가톨릭교도들은 일제 강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전도를 위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본 당국과 천주교보다 일본 당국에 훨씬 더 원망하는 경향이 강했던 한국인 개종자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출범 이후, 3·1운동은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끈질긴 열망이었다. 이러한 열망은 반신으로 알려진 단군이 하나의 국가로서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들의 역사적 기억과 상상력에 의해 촉진되었다. 두 번째는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 첫 10년에 기인하는데, 서울에서 일본 총독부가 무시무시한 순사들을 동원해 인종 차별, 조직적인 테러, 고문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만세!"라고 외쳤다.

시위대가 "만세!"라고 외쳤다.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원칙 연설은 3·1 운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윌슨이 미국인들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합류하는 것을 설득한 9개월 후, 윌슨은 전후의 세계 질서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의회의 합동 회의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연설은 전 세계의 식민지인들에게 자결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이상은 한국처럼 미국의 연합국이 강점하고 있는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허하게 변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연설이 처음 방송되었을 때,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그것을 행동으로의 명확한 부름으로 받아들였다.

처음 만세운동을 조직한 한국인들은 한국에 있는 동포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세계정세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디아스포라에 있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중국과 미국에 있던 한국 이민자들은 1919년 1월에 시작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힘을 모아 나섰다. 그들은 파리와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영향력 있는 한국인들이 파리 대표들을 지지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도록 설득하였다.

그들의 시위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만족하고 있다는 일본 선전의 거짓을 드러내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공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토착 종교인 천도교의 지도자들도 평화적인 시위를 계획했다. 1919년 2월 22일, 이 두 종교는 힘을 합쳤다. 닷새 뒤 불교도들이 이 시위에 합류해 3축의 종교지도자들의 동맹의 키가 마무리했다. 33명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에 그들의 이름을 올렸고, 그 사본은 널리 배포되었다.

기독교인들과 한국의 독립

1919년 3월 1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 파고다 공원에 모였다. 오후 2시, 한 청년이 공원 한가운데 있는 연단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의 낭독이 끝나자마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 (한국의 독립이여, 영원하라!)라고 열광적인 함성을 질렀다. 수도 서울과 전국에 걸쳐, 한국인들은 비슷한 시위를 벌였다. 며칠 안에, 독립운동은 한국의 모든 곳에서, 그리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일어났다. 한국의 281개 군 가운데 7개 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2백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1,500개 이상의 시위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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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와 열렬한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개신교도들은 그 운동에서 가장 큰 리더십을 발휘했다. 개신교 리더십의 중요성은 시위 기간, 일본이 체포한 사람들 수로 확인될 수 있다. 1919년 일본 군사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 후 19,525명의 한국인들이 체포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체포당한 전체 수의 거의 20%를 차지했다. 종교인들 가운데 체포된 사람 6,310명 중 절반 이상이 개신교 신자였는데, 1919년 당시 개신교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를 약간 넘는 정도였다. 게다가, 체포된 489명의 성직자들 중 거의 절반과 체포된 471명의 여성들 중 2/3가 개신교도였다.

시위대 행렬에 합류한 여성들

시위대 행렬에 합류한 여성들

3·1운동은 비폭력 시위로 계획되었으나 그 계획대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한국의 지도자들은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양심에 호소하려 했고, 더 중요하게 파리 평화 회의에서 서구 정복자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려 하였다. 대신, 시위는 주한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하고 총격을 가한 순사들을 자극했을 뿐이다. 그로 인해 일부 시위는 폭력적 폭동으로 변했고, 추가 일본군이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위가 진정되었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7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5,00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으며, 715채의 가옥과 47개의 교회, 2개의 학교가 완전 파괴되었다.

봉기에 대한 선교사의 대응

3.1운동이 진행되면서 시위가 자발적인 격발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일본이 한국 정보기관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기에, 많은 일본인들은 외국 선교사를 주동자로 의심하고 비난하였다. 1919년 3월 12일 한국에서 발행된 일본 신문인 조선신문에 “한국인의 마음을 동요시킨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죄”라고 비난한 바 있다. “이번 봉기는 그들의 소행이다. … 그들은 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윌슨의 원칙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그들의 종교 뒤에 숨었다.”

이러한 보도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시위는 일본 못지않게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이 승인하지 않을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한국인들을 사주하고 협력한 혐의를 받고 있는 선교사들은 일본의 비난을 강력히 부인했고 그들의 정치적 중립성을 재확인했다. 결국 3월 중순, 일본 총독부는 선교사들과 미국 영사관의 압력으로 선교사들의 무죄를 공표했다.

덕수궁 근처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덕수궁 근처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교사들이 공언한 정치적 중립을 고려하면 선교사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비밀을 지킨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고려하면, 이 결정은 충분히 현명한 결정이었음이 증명됐다. 시위가 확산되자 많은 선교사들은 온정주의에서 비롯된 개종자들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과 개종자들의 정치적 행동이 선교 사역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본능적으로 한국 개종자들의 참여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학교와 교회를 휩쓴 민족주의적 열정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일본 당국의 유혈 진압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목격한 후, 선교사들은 더 이상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상자 보호에 적극 나서게 됐고 그들의 슬로건을 바꾸어 '잔혹 행위에 대한 중립 거부'를 천명했다. 그들은 도덕적 의분을 가지고 일본 당국에 대해 시위자들에 대한 폭력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일본이 이런 호소에 대해 귀를 닫자, 선교사들은 해외 경로를 동원했다. 그들은 일본인들의 잔혹 행위를 기록했고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유럽과 미국의 선교위원회와 영향력 있는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미국 교회 연합회(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에 의해 약 1,000페이지 규모의 문서가 발행되었으며, 1919년 7월에는 “한국 상황: 목격자에 의한 최근 사건들의 믿을만한 설명”의 팸플릿이 출간되기도 했다. 수많은 설명들 중 인용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3월 4일 낮 12시 30분경, 한국인들은 다시 큰 함성을 질렀다. 이런 함성을 지르는 군중들에 맞서 일본 소방대는 곤봉을 사용하려 해산을 시도했고, 일부는 곡괭이 손잡이를 들었고, 일부는 긴 창의 나무 고리를, 일부는 쇠막대, 다른 이들은 단단한 막대와 소나무 곤봉을, 또 다른 이들은 짧은 손잡이의 곤봉을 사용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달려들어,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내에 중상을 입을 때까지, 그들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창 갈고리로 그들을 여기저기 낚아챘다. 얼굴에는 피가 줄줄 흐르는 가운데, 소방대원들에 잡혀 경찰서로 끌려가는 이들이 많았다.

파주에 살던 34세의 정용휘 씨는 3월 28일 오후 1시, “만세(한국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는 400여 명의 군중에게 총격을 가한 일본 헌병들과 맞닥뜨렸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심지어 돌멩이로 무장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8명이 사망했다. 정용휘 씨는 목에 총을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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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 참여로 인해 체포된 학생들

독립 운동 참여로 인해 체포된 학생들

이러한 보고서는 미국 상원에서 일본 비판자들에게 제공된 무기였고,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기에, 일본 정부에게는 미국과의 공식적인 관계에 있어서 악몽으로 판명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당국은 무력 사용을 포기했고, 한국에 대한 엄격한 식민지 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을 주도하면서 개신교도들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연결되었고, 이는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에 좋은 촉매제 역할을 했다. 교회사 학자인 알프레드 와슨은 1934년에 출판된 그의 책 “한국의 교회 성장”에서 “한국의 여러 교회들에게 1920년은 교회 성장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이 급속한 성장의 시기는 독립운동에 의해 선도되었다.”라고 썼다. 수량화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선교사들이 받은 새로운 차원의 신뢰였다. “선교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비난은, 사람들의 마음에 선교사들에 대한 신용을 잃게 하는 대신, 그들을 더 호의적으로 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동지로 여겨졌다.”

Timothy S. Lee는 텍사스 포트워스에 있는 Brite Divinity School의 기독교회사 부교수이다. 그는 Born Again: Evangelicalism in Korea(호놀룰루; 하와이 대학 출판부, 2010)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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